동그란 키보드를 손 아래 두고 누른다. 손가락 하나, 하나 의지를 갖고 누르는 것이 아닌, 머리와 마음이 가는대로 따라 쓴다.
자존감이라던가 용기라던가 하는 말들은 내뱉는 순간 왠지모를 치기어림이 느껴져, 정말로 깊은 밤이 아니면 잘 꺼내놓지 않는다. 치기어림을 느끼는 것 또한 아직 성숙하지 못했다는 증거지만, 그럼에도 느껴지는 거부감은 나로 하여금 여전히 속내를 털어놓기 힘들게 만든다.
좋아하는 것들을 나열하다 보면 스스로에 대해 알게 되는 때가 있다. 왜 좋아하는지를 고민할 때라면 더욱 그렇다. 포켓몬은 귀여운 것이 좋다. 팀을 이루어 이겨낸다는 것이 좋다. 무민은 여유로움이 좋다. 어설픈 대화와 관계 속에서 자신을 돌보며 저녁을 즐기는 것이 좋다. 유희왕은 믿음이 좋다. 자신을 믿고, 자신이 노력한 것을 믿고, 자신의 미래가 밝을 것을 믿고 위치에 관계 없이 부딪히는 것이 좋다. 스티븐 유니버스는 따뜻함이 좋다. 다 괜찮다고, 너는 사랑스럽다고 말해줄 수 있는 사랑스러움이 좋다.
그렇기에 귀엽고, 여유롭고, 믿음직하고, 따스한 것이면 좋다. 그런 사람도 좋고 그런 공간도 좋고 그런 음식도 좋다. 그런 기억은 내 안 어딘가에 남아 자존감이 필요할 때 주섬주섬 꺼내 쓸 수 있다. 정체성을 저금해두는 통장같다.
슬슬 그런 것들에 의지하지 않고도 자존감을 찾고 싶지만 아직은 때가 이르다. 창작에서 자존감을 찾던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다가도 그것은 순전히 내 의지에 달렸고 어떤 변명거리도 통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슬그머니 한탄하길 멈춘다. 내 탓이다. 내 탓이 아니다가도 어느새 그러해진다.